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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라-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덧글 0 | 조회 1,415 | 2014-01-04 00:00:00
이창순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8)




  성경에서 감사하라, 찬양하라, 기뻐하라와 같은 명령형 말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사람의 감정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이며 능동적 감정인 동시에 행위인 것이지 누군가의 강요나 명령에 의해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편지하고 있다. 또 그는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도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8)”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 교회나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의 사정을 바울이 다 아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감사하라고 한다. 그들 중에는 감사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사정이 있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기에 “감사하라”, “기뻐하라”는 명령은 예수를 처음 믿기 시작한 나를 참으로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이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에 끊임없이 투덜대고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도대체 이 무슨 소리인가 ‘부활’, ‘영생’ ‘구원’ ‘대속’ ‘은혜’ 등등....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의 소개로 처음 만난 여자(아내)의 간절한 부탁으로 처음 교회에 간 아주 똑똑(?)하고 지극히 이성적(?)인 과학도인 나는 이러한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말들에 당연히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나는 이러한 내색을 할 수는 없어서 꾸준히 집사람이 다니던 교회에 출석은 하였지만, 예배에 참석하여서는 집사람이 원하는 앞자리 대신 제일 뒷자리에 않아서 목을 빳빳이 들고 오늘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 목사가 하나를 기대하며 앉아 있었다. 우리집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는 이런 저런 이성적(?) 질문으로 우리집 사람을 괴롭히고 힘들게 만들기 일 수였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종교를 하나쯤 가져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만일 종교를 하나 갖는다면 불교나 천주교가 좋을 거라는 생각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비이성적(?)이었지만, 불교는 너무도 이성적이며 논리적이어서 너무도 똑똑(?)한 나에게 가장 적합하고 학문적 매력이 넘치는 종교였다. 예를 들면 “살생하지 마라”는, 너의 유익을 위해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마라라는 의미라니 얼마나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쉬운가? 종교의 선택이 종교의 필요성의 인식으로 선택한다면 불교와 같은 이성적 인식이 우선되는 종교가 당연히 선택될 것이다. 이에 반해 ‘구원’ ‘삼위일체‘, ’부활‘ ’영생‘ 등과 같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한 것이니(엡 1:8-9)”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상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를 우리는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와 사망의 늪에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게 되니 데살로니기 교회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한 바울처럼, 또한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중략)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임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마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라는 하박국 선지처럼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삐딱한 이런 나를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그 은혜의 손길을 내게 내미셨다. 집사람과 결혼하고 여전히 건성으로 교회에 출석하던 나에게 어느 날 ‘구원’이 무엇인지 내가 정말 알고 싶지 않느냐고 물어오셨다. 이 질문은 내가 전혀 내 스스로 알고 싶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은 것 이었다. 그런대 어느 날부터인가 이 질문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전혀 내가 의식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불쑥 나를 찾아와서는 몇 시간씩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성경을 재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교회에 출석한지 5년이 지났지만, 그저 예배시간에 본문 말씀을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질문은 나에게 성경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괴로워하며 창세기를 펼쳤고 첫 줄을 읽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한 번 이 구절을 읽은 후에 창세기를 읽어 나갔다. 놀랍게도 그 몇 달간 창세기가 이해되기 시작하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수긍되기 시작하였다. 내게 하나님이, 내 눈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그 뜻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1990년 나는 처음 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으로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그 뜻대로 내가 출석하던 교회의 정길룡(의사) 집사와 창원에서 창조과학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우리의 목표는 공교육 기관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으로 인하여 창세기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는 청소년들과 청년(대학생)들을 위하여 진화론의 허구성과 비과학성을 알리는 것이다. 또한 과학자인 우리가 성경의 창세기가 과학적 관점에서도 모순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공교육기관에서 배우는 진화론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의 기초(죄와 구원의 원리의 시작)가 되는 창세기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임을 깨달아 알게 하는데 있다.




  물론 이것은 복음의 진리를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는 결코 아니다. 단지 현대 사회에서 과학이란 이름으로 복음의 진리를 폄하하는 세력들-복음을 증거하는데 창세기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들, 창세기를 기독교적 설화로 폄하하는 사람들 등-로부터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창조과학 전임사역자 중에 한 사람인 이재만 선교사(지질학자)는 ‘창세기 1장이 가슴 벅차게 믿어지는 창조과학 콘서트’라는 책 서문에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그 하나님입니다. 성경대로 창조하시고, 성경대로 이끄시는, 성경대로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 하시되 성경에 써 있는 대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2004년 우리 가족은 큰 시련을 겪었다. 42살에 낳은 우리 아들(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 선천성 뇌동맥 기형으로 뇌출혈을 일으켜 왼쪽 팔과 다리를 비롯한 몸의 왼쪽이 모두 마비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3개월 동안 병원에 누워 있었으며 2년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아이의 치료를 위해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고, 나도 학교를 1년 동안 휴직을 해야 되었다. 우리 부부는 매일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도 다른 하나님의 계획이셨다. 그동안 하나님을 섬기다고 하면서 이런 저런 활동과 봉사를 해왔지만 정말 우리가 예배다운 예배를 드렸는지,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시편 120편부터 135편처럼 우리는 주일날 진정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위해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 전에 나갔는지 우리 자신에게 돌아 볼 수 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첫사랑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계시록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라고 칭찬한 후에 첫사랑을 버렸다고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첫사랑의 회복이 필요한 것이었다. 첫사랑의 회복은 감정적 사랑의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곧 깨달았다.




 단순히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을 때의 벅찬 감정과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정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회복이었다. 어느 결엔가 예배는 형식적이 되었고, 주일 아침에 늘 허겁지겁 교회로 가기 바빴고, 예배시간에도 예배순서마다 집중하지 못 하고 있었다. 우선 주일예배를 위해 나의 일주일간의 삶을 절재할 필요가 있었다. 주일 예배를 들이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제거해 나가고 육체적으로나 영적인 상태가 예배를 들이는데 최상의 상태가 되도록 하였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산성이요 피할 바위이신 내 하나님께 온 맘 다해 찬송하고 기도하며 예배들이기를 기도하였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신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니라(롬 8:28)” 예배의 회복은 우리의 삶이 곧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회복을 가져왔다. 우리 아들은 아직도 다소 왼쪽 팔과 다리가 불편하지만 거의 정상에 가깝고 두 딸과 아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한다. 얼마 전에 결혼한 큰 딸에게 중매가 들어와 내가 ‘선 한번 볼래’라고 물어보자. 직장이 어딘지 학교는 어딜 나왔는 지와 같은 것은 단 한마디도 묻지 않고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야 아니면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이야”라고 물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왜 학벌이나 직장은 묻지 않았냐고 하자 “그런게 뭐 중요해. 하나님의 은혜받은 사람이면 다 해결되는데”라고 답하여 나를 놀라게 하였다. 오늘도 나는 고백한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글쓴이 이창순 (사단법인 사랑샘공동체 이사 / 창원대 자연대 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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