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 내 아들아! (삼하18:28-33)
다윗은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 압살롬이다. 그에게는 다말이라는 누이 동생이 있었고 또 암논이라는 이복 형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암논이 압살롬의 친누이 동생 다말을 짝사랑하여 상사병이 들 정도였다. 암논은 그의 못된 친구 요나단의 계략을 듣고 교묘한 방법으로 다말을 침실로 끌어들여 강제로 겁탈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심한 모욕과 함께 무자비하게 그녀를 쫓아내버린다. 엉겹결에 너무나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다말은 너무나 분하고 슬퍼서 엉엉 울게 된다. 그것을 본 그녀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그런 몹쓸 짓을 한 자가 이복형인 암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압살롬은 암논을 죽일 계획을 하게 되고 드디어 2년 후 기회를 잡게 되어 무자비하게 그를 살해한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왕은 노발대발 화를 내게 되고, 압살롬은 부왕이 무서워 이웃 나라로 도망을 친다. 그런데 자식을 향한 부모들의 마음이 그렇듯이, 비록 자식이 죄를 짓고 도망을 쳤을지라도 세월이 지나면서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하게 된다.
그러나 왕으로서 체면상 표를 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슬퍼하고 있을 때 요압 장군이 눈치를 채고는 왕으로 하여금 압살롬이 예루살렘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낸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도 다윗은 압살롬을 찾지를 않는다. 2년이 지나도 부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압살롬은 요압 장군에게 항의하게 되고 결국 요압의 중재로 부왕을 만나게 된다. 실로 5년 만의 부자 상봉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압살롬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하는 무서운 야심을 품고 용의주도하게 준비를 하게 된다. 그 방법으로 매일 아침 성문에 서서 억울한 일을 당하여 왕에게 재판받으러 가는 백성들을 한사람 한사람 붙들고서 왕에게 가봐야 소용없다면서 자기에게 얘기하라며 온갖 친절을 베풀게 된다.
삼하15장6절에 보면 “압살롬이 이같이 행하여 다윗왕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다”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다윗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백성들에게 못된 왕으로 인식되고 만다. 압살롬은 이런 못된 짓을 4년 동안이나 한 다음 민심이 자기를 향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찬탈할 거사를 시작하게 된다.
결국 그는 자기가 왕이 되었다고 선포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예루살렘 왕궁을 공격해 온다. 생각지도 못한 패륜적인 일을 당한 다윗은 겨우 몇백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도망을 치게 되고 압살롬은 부왕이 미처 데리고 가지 못한 후궁 열명을 왕궁 옥상에서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대낮에 겁탈하게 된다.
그리고는 대군사를 거느리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추격하게 된다. 이리하여 부자간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고 결국 압살롬은 요압 장군에 의하여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로써 전쟁은 다윗의 승리로 끝이 난다. 전쟁에 이겼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기뻐하기는 커녕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는 오히려 크게 슬퍼하며 “압살롬 내 아들아!” 하면서 대성통곡한다. 이상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다.
오늘 우리는 다윗왕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모님의 사랑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것을 몇가지 발견하게 된다.
첫째, 부모의 사랑이란 사랑할 가치조차 없는 자식인데도 사랑한다는 것이다.
압살롬처럼 못된 자식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그야말로 사랑할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압살롬을 사랑해서 부하 장군들에게 혹시 우리가 전쟁에 이기더라도 압살롬은 살려주라고 부탁할 만큼 그를 사랑했고, 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큰 슬픔에 빠졌다.
둘째, 부모의 사랑이란 자식의 불행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마음 아파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부터 부모님들은 자식이 잘되었을 때는 모든 공을 자식에게 돌린다. “저 자식이 저렇게 잘 된 것은 부모 닮지 않고 자기가 잘해서 그렇다고” 그러나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는 “저 자식이 저렇게 된 것은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내가 못 먹이고 못 입히고 못 가르쳐서 그렇다”고 하면서 모든 잘못을 자기 탓으로 돌린다.
셋째, 부모의 사랑은 자기 생명보다 자식의 생명을 앞세우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은 “압살롬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하면서 대성통곡한다. 즉 자기 생명 보다 자식의 생명을 앞세운다.
이러한 3가지 부모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을 조용히 묵상하면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부모님을 학대하는 자식들, 부모님을 멀리하려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본다.
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 조상들은 부모님의 은혜를 알고 효도를 했는데, 기독교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할까? 성경이 4서5경보다 못해서일까? 예수님이 공자님보다 못해서일까? 복음의 능력이 유교의 도덕률보다 못해서일까?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4가지를 명심했으면 한다. 첫째, 부모님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는 습관을 키우자는 것이고, 둘째, 연로하신 부모님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습관을 키우자는 것이고, 셋째,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는 하나님의 법칙을 명심하자는 것이고, 넷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사랑의 실천을 부모님에게 행하자는 것이다.
요일4장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부모)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부모)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지 않게 하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열매가 보이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자. 그럴 때 하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 내가 믿어주마” 하시면서 약속된 복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글쓴이 강완석 / 창원산성교회 원로목사, (사)사랑샘공동체 지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