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샘터(사랑샘공동체 무료생활관) 입소자의 글
나는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딱히 기억에 남는 일은 그리 많지가 않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서 가족들과 가까운 곳으로 놀러간 기억도 어렴풋이 온 가족이 함께 용지 못에 가 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다. 지금은 산복도로이지만 도로가 생기기 전 산이었고 산 밑에 몇 가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가구가 우리 집이었다. 다섯 가족이 한방에서 모여서 자고, 부엌이 있는 작은 집, 산을 등지고 있어서 집안에 뱀이 구멍사이로 한 번씩 들어오고, 어느 날엔 엄청나게 큰 뱀이 들어와서 밖으로 뛰쳐나갔던 기억이 난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구렁이었다고 들었다.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뱀을 보았다.
아버지 직업은 목수이셨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어린 시절, 이사를 자주하다보니 우리 형제들은 동네에 친구들이 없어서 형제끼리 자주 놀았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보니 형제 우애도 있었다. 우리 삼형제들은 형, 나, 동생 순으로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버지가 일을 매일 하시는 게 아니라 일거리가 있을 때마다 일을 하셔서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 시절 육성회비도 제대로 납부하지도 못했다. 어린 나이에 선생님이 불러서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부모님께 육성회비 말씀드리라고 말할 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크게 기억나는 건 없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겨울방학하기 전 학급마다 불우한 가정인 학생에게 단체에서 주는 물품이 있었는데 그 대상자에 내가 선정된 것이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그대로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 집까지 정신없이 달려가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지나 선생님이 직접 상자를 가지고 집으로 찾아오셔서 부모님께 설명하시며 드리는 걸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눈으로 직접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형도 동생도 나와 똑같은 상자를 가지고 집으로 왔다. 같은 학교에 우리 삼형제는 모두가 어느 단체에서 주는 불우한 이웃 학생으로 선정되었고 그때 또 한 번 우리 집이 정말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못 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집이 가난하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고정수입이 있는 직업이 아니셨지만 나의 성격은 내성적이고 남들 앞에 나서서 무엇을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친구들이 많았다. 난 친구들이 많은 게 너무 좋았다. 유년시절에 기억에 남는 일들이 정말 없다. 중학교 생활이나 고등학교 생활도 크게 기억에 남는 일도 없다는 게 생각해 보니 씁쓸하다.
우리 형제들은 조금씩 커가면서 초등학생 때처럼 같이 지내다보니 자연스럽게 누구에 잘못도 아니지만 거리가 생기게 된 것 같다. 우리 삼형제는 부모님이 자주 싸우시는걸 보며 성장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당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삼형제는 아버지가 두렵고 어려웠다.
나에게는 (지금은 죽고 없지만) 한 살이 많은 형이 있었다. 정말 많이 싸웠다. 그럴 때마다 항상 내가졌다 형은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았다. 성인이 되면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는데 결정적인 일이 생겼다.
그것은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가야하는 상황에서 등록금이 없다는 게 발단이었다. 당연히 돈을 모아 두었을 것이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어머니가 돈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화가 많이 나셨다.
자초지종을 묻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셨고 참다못한 아버지의 행동을 보며 겁이 나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경찰서에 직접 전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당시 내 나이19살이었다. 정말 아버지가 그냥 다 같이 죽자며 위협을 했었다. 그날에 내 눈에 비추었던 아버지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 어린동생이 울던 모습이 아직까지는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 일이 있고난 이후에 더 빨리 독립을 해야겠다라고 결심을 굳히게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시기에 IMF가 터져서 나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군 입대 지원을 하기로 결심해서 직업군인을 하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두 번 다 탈락하였다. 그 후 육군기술병으로 지원해서 입대하게 되었다. 군 생활 2년 2개월동안 훈련포상, 사격포상, 대대장포상 등으로 휴가를 자주 나왔었다.
부대에서 3개월 이상 있어 본적이 없었고 군 생활을 함에 있어 소대장님이 병장(계급) 제대가 3개월 남았을 때 하사관에 지원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난 생각이 없다고 말했고 직업군인이 되려고 했었던 나의 계획도 다 포기했었다.
군 생활하면서 힘들었던 시기는 있었다. 일병이라는 계급으로 휴가를 나왔는데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던 것이다. 형과 비슷한 시기에 군 입대를 해서 집엔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 이렇게 있었는데 결국은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고, 동생은 고2이었다. 군입대 후 집에서 본 동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집에 있던 동생도 그 생활이 힘이 들었을 것이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교도 안가고 밖으로 겉돌았던 걸 알게 되었다. 어머니도 우리 형제들이 다 컸으니 더 이상 참지 않고 집을 나가셨다. 내가 취할 수 있는 선에서 어머니에 대한 행방에 대해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나이 21살(지금은 44살). 어머니와 같이 지낸 시간보다 잊고 살아온 시간이 더 길다.시간이 지나 형과 군제대 후 형이랑 동생이랑 아버지랑 아주 잠깐이었지만 같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아주 잠깐 그 뒤 형은 대학교 복학으로 떠나고, 동생도 그 당시 군 입대했고, 나 또한 집에서 나와 혼자서 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가족은 자연스레 점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우리 삼형제에게 늘 이야기를 하셨다. 부모가 못 배워서 너희들은 공부 잘 해라. 배워야 무시를 당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서는 스스로 살아라. 부모가 돈이 없어서 도와주지 못한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군제대 후 일용직, 주유소 알바, 회사 근무, 이런저런 일을 해봤다. 군입대 후 시력이 급격히 안 좋아서 지금은 0.1/0.5 정도이다. 나의 20대 시절은 부모라는 울타리를 떠나 홀로서기의 시작이었다.
직장생활은 22개월, 그리 오래하지 않았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회사를 다녀본 기간이다. 회사는 나에게 맞지 않았다. 20대 후반에 모아두었던 돈을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서 다 날린 적이 있다. 힘들게 몇 년 동안 모았던 돈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려서 포기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노숙이란 걸 하게 되었고, 자포자기한 상태로 2년가량을 노숙생활로 지내오다 어떤 분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일을 배우다 이용당하겠다는 의구심이 계속 생겨서 다시 그 일을 포기했다.
이런 저런 일을 겪다보니 창원이라는 곳이 싫어져 다른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순간 또 다른 분을 만나 경기도로 가게 되었는데 인생 최대의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내 명의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아 다른 사람이 사업장을 운영해서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산으로 내려와 버렸다. 이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도중에 엄청난 금액의 세금이 내 앞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일을 알게 된 순간 이미 늦어버렸다.
왜 사람들은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이용하는 걸까?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며 살아오지 않았는데.... 지금 처한 상황을 누굴 탓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한 것이며 선택에 대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2022년 3월16일, 사랑샘공동체 생활관에 오게 된 건 밖에서 생활하며 근처에 있는 교회에 컵라면을 매일 받으러 가면서 목사님께 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사랑의 교회 목사님께서 이 곳을 알려주셔서 찾아오게 되었다.
지금까지 20여년이라는 시간을 혼자 지내 와서 20대엔 꿈도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사람이 싫었고, 누군가 나에게 잘해주면 이용하려고 잘해 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앞섰다.
어느 순간부터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어떤 목적의식, 어떤 희망, 그저 하루하루 의미 없는 시간... 정해진 답은 없다. 나의 의도와는 전혀 모르는 사이에 신용불량자, 고액세금 미납자, 이 모든 것이 내가 잘못 살아 온 결과물인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타의든 자의든 나에게도 나만의 안식처가 필요하다. 삶을 되돌아보니 내 자신에게 미안해진다. 앞으로 내 자신에게 노력을 해야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글쓴이 이 0 0 (44세, 창원출신, 사랑의샘터 입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