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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샘봉사자 칼럼/추억의 바다 덧글 0 | 조회 3,677 | 2022-09-01 00:00:00
관리자  

사랑샘봉사자 칼럼 - 추억의 바다

 

나이가 많아지면 추억도 많아진다고 한다. 하기야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어찌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많지 않으랴. 금년에 82계단 올라서서 온 계단을 뒤돌아보니 아득하다. 추억은 아름다운 과거뿐 아니라 아픈 과거도 날개를 펴고 날아오기도 한다.


나의 고향은 시골 경남 함양군 수동면이다. 우리 마을에는 바다는 없고 강만 있어 여름이면 동무들과 강에 가서 물장구치고 헤엄도 쳤다. 강물이 흘러 흘러 바다로 간다는 말은 들었어도 눈앞에 큰물이 모인 바다는 보지 못하고 자랐는데 초등학교 졸업하고 마산으로 이사 와서 바다를 처음 보았다. 그 바다가 좋아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바닷가에 가서 놀고 조개도 잡고 했다.


그런데 그 좋아하던 바다에서 죽을뻔한 사고를 두 번 당했다. 중학교 때였다. 외숙모가 구실(귀곡)에 가서 홍합을 캐러 가자고 하여 나와 아래 동생과 따라나섰다. 당시 구실에는 작은 해수욕장이 있어서 여름 오면 통통 배를 타고 건너갔었다. 우리 배는 할아버지가 노 저어 갔는데 갈 때는 함께 가던 아주머니들과 떠들고 재미있게 갔다.


바위에 붙어있는 커다란 홍합도 줄줄이 따고 파래도 건지고 조개도 캐고, 싸 가지고 온 도시락도 열어 먹고 참 즐거웠다. 한데, 아주머니들이 노 저어온 할아버지에게 술을 억지로 먹여서 돌아오는 바다에서 사고가 났다.


당시 마산항에는 외국의 큰 배들이 들어와 정착해 있다가 떠날 때는 붕! 커다란 뱃고동 소리 울리며 나가는데 배가 큰 만큼 물살도 커져서 작은 배는 근처 가면 휩쓸려 들어가 파산되기도 하기에 큰 배 떠날 때는 조심을 하는데, 우리 노를 젖는 할아버지는 술을 먹어 정신없이 큰 배 밑으로 배를 몰고 갔다. 우리 배는 가랑잎이 물에 떠도는 것과 같아서 센 물살 밑으로 자꾸자꾸 들어갔다. 헤엄도 칠 줄 모르고 영락없이 죽게 되었다. 배 안의 아주머니들은 사람 살려 달라며 고함을 지르고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도와 달라고 엉! 엉! 울었다.


마음 약한 나는 삶을 포기하고 울고 있는데 생활력이 강하고 모든 일에 긍정적인 내 동생이 큰 배 위를 바라보고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니 뱃머리에서 본 흑인이 선장에게 신호를 보냈는지 배가 천천히 가고 우리 배는 물살과 돌다 돌다 신마산 부둣가에 닿았다. 눈앞의 광경을 보고 모여든 사람들이 선창 가에 줄을 서서 보고 있었다. 우리들은 혼이 나가선지 가지고 온 물건들은 하나도 가지고 내리지 않았다. 그냥 어지러워 대합실 의자에 누워있었는데 순경이 와서 할아버지를 잡아 갔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독일에서 온 벤박((BenBack)선교사 일행이 날 보고 통영교회서 한 주간 부흥회를 하는데 반주를 해달라고 해서 마치면 여수 고모 집에도 갈 겸 따라나섰다. 선교사 일행과 나는 천신호 1등 석에 탔다. 천신호는 대형 선박이며 우람찼다. 방학 때면 그 배를 타고 고모한테 갔다.


벤박(BenBack)선교사는 설교도 잘하지만 음악선교사다. 내가 피아노를 잘 친다고 부흥회가 마치고 독일로 데리고 가서 피아노 공부를 시켜 주겠다며 독사진도 찍었다. 배 타고 가는 중간중간에 김밥 장사들이 돌아다니며 김밥을 파는데 그 또한 일미였다. 그때 배 안에서 사 먹었던 충무김밥이 가끔 생각나서 이곳 마산에서도 충무김밥 간판이 보이면 사 먹었는데 그때 맛이 아닌 것 같았다.


통영에 도착할 즈음 되어서 갑자기 내 마음에 흔들림이 왔다. 무슨 맘인가 하면, 요즘은 부흥회 하는 교회도 별 없지만 한다는 교회는 이틀 정도인데 당시는 월-금요일 새벽. 낮. 밤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 오랜 시간 반주를 할 것 생각하니 고생할 것이 뻔해서 그만 꾀를 부려 배가 아파서 교회 안 가고 고모 집으로 가겠다고 우겨대니 선교사도 어쩔 수 없는지 통영항에 내리고 나는 여수로 향하고 있었다. 

 

여수항을 두 시간 앞두고 갑자기 하늘이 울고 시커먼 구름이 바다를 어둠에 덮더니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여름이라 소나기가 오려는 줄 알았다. 1등석은 제일 윗 칸인데 내가 탄 홀에는 선교사가 내리고 서울의 어느 사장 부부만 있었다. 물살이 거칠고 배가 흔들렸다. 나는 두려움이 왔다. 중학교 때 사고 났던 기억이 나서 겁을 잔뜩 먹고 “하나님 살려주세요. 제가 선교사 따라갔으면 이런 무서운 폭풍에 떨지 않았을건데 요나 같이 하나님 시키는 곳에 안 가고 도망치다가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저를 한 번만 살려주시면 다시는 이런 잔꾀를 내지 않고 충성하겠습니다” 하며 엉엉엉 크게 울었다.


사장 부부도 날 따라 기도를 했다. 그 부부도 예전에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 했는데 부자 되고부터는 돈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교회를 멀리했다면서 회개를 하였다. 부인은 남편 보고“여보, 배가 파산되면 당신이 나를 논개같이 꽉 껴안고 바다에 떨어지자”면서 울었다.


3등실에서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남자들이 1등실로 올라와 배를 돌리기 시작했다. 배가 파도 따라가면 파산이 안되지만 빙빙 돌면 파산된다고 한다. 부산서 오는 천신호도 파산 된 것 같다는 말들을 하면서 짐을 바다에 다 던지라고 해서 던졌다. 1등석에 있는 우리 세 사람에게 구명대라며 노랑 조끼 같은 것을 주었는데 그 옷 입고 뛰어내려도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해서 입지 않았다. 어지럼증에 온 배가 돌고 돌아서 기절했는지 모르지만 12시간 만에 여수 어느 병원에 누워있었다.


하룻밤 병원에서 자고 나니 고모와 고모부가 와서 날 보고 통영에 안 가고 왜 이런 끔찍한 사고를 당했느냐고 물어서 자백을 했다. 여수 미평교회서 목회를 하는 고모부가 주일에 교인들 앞에 나가 간증을 하라고 하여 스스로 <요나>라고 말했다.


여름방학을 고모 집에서 쉬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겁이 나서 배는 죽어도 못 타겠고, 시간이 더 걸려도 버스 타고 순천으로 가서 순천서 기차를 타고 진주까지 둘러서 마산에 도착했다.


갑자기 교회 소식이 궁금하여 고모가 사준 해물을 들고 사찰 집으로 갔다. 사찰 할머니가 날 보고 “네가 누구냐? 영숙이 닮았는데---” 해서 “제가 영숙이에요” 하니까 놀라며 빨리 집으로 가라고 하면서 “너희 집은 초상집이 되어 있다” 고 했다. 50년대는 통신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신문만 보는 때라 교회서는 내가 배 사고로 죽었다고 알려졌다고 한다.


집 대문 앞에 서서 집안을 보니 아버지가 집수리하다가 그만두고 넋이 나가 멍?? 서 있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 아버지! 영숙이에요” 서너 번을 불러도 고개도 돌리지 않으시고, 물동이 이고 집으로 들어오시던 어머니는 날 보자 놀라서 물동이를 떨어뜨렸다. 동네 나갔던 할머니는 들어오시어 날 보고 누구냐고 물어서 영숙이가 살아왔다고 하니까 아니다, 아니다, 영숙이는 죽고 혼이 찾아 왔다고만 하신다. 아버지가 할머니께 영숙이는 죽지 않고 살아왔다고 설득을 시키시니까 그제야 나를 껴안고 우셨다.


세월은 강물같이 흘러흘러 바다와 싸워 이기고 살아온 지 어언 60년이 지났다. 지나는 동안 바다 공포증에 큰 여객선 아니고는 마산 앞바다의 돝섬도 안 가고, 우리 애 둘이 대학 졸업여행을 배 타고 제주도 간다고 해서 못 가게 했다. 참으로 바다는 무섭다. 순풍에 노만 저어 간다면 무섭지 않겠지만, 폭풍우 치는 성난 바다를 만나면 대책이 없다. 우리 인생도 바다의 삶과 같다. 나의 능력으로 이 파도 치는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늘에 내 목숨을 걸고 하루하루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살 뿐이다. 오늘 나는 이 자전 수필을 쓰면서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겨 미소를 머금어 본다.

 

글쓴이 / 정영숙, 음악인, 시인, 마산성막교회 은퇴전도사, 사랑샘침례교회 협동전도사, (사)사랑샘공동체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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